Artists
All to Me, All from Me, All together !
획에서 획으로… (최윤미 작업 노트)
나는 작품에서 시간을 담는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시간을 물리학적으로 개념을 정리하거나 시간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시간이라 느끼는 것은 상대적으로 관념적인 것이었다.
네이버에서 시간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 또는 그 단위를 일컫는 말이다.
어렵다. 약속되 어느 기준점에서 어느 기준점까지가 우리가 흔히 일컫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빨리 흐르는 시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빠르거나 느린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시간이 흐른다고 한다.
몇 년 전만 해도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시간을 담는다고’고 이야기했다. 하루의 시간 동안 ‘원ㅇ’을 반복적으로 그리면서 그 변화된 신체의 리듬을 담는다고 했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작품의 크기를 결정짓는다고도 했다. 시간이란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 또는 그 단위’라고 하는데 하루하루의 시간은 그저 시적인 표현으로 애매모호한 표현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품이라 하면 작가의 의도가 존재하는데 나는 그저 ‘원ㅇ’을 반복적으로 그릴 뿐이었다. 그러면서 장자(莊子)의 도가 사상을 가져와 개인의 내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하는 한편, 그림의 그리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일체의 것을 잊어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작업이라고도 했다. 또 불교의 ‘자리이타(自利利他)’ 개념을 가져와 나를 이롭게 하면 남을 이롭게 한다라고도 해석을 하였다.
결국에 ‘원ㅇ’을 그리는 것은 자기 수행적인 그림이다.
왜 자기 수행을 했어야만 했는가?
일본에서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을 겪고 나서, 한국으로 귀국한 후 ‘원’을 그리게 됐다. 쓰나미의 검은 바다를 잊을 수가 없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바다’. 그 검은 바다의 트라우마를 겪고 나서, 그림의 시작인 ‘점’을 가지고 ‘원ㅇ’을 그렸다. ‘원ㅇ’을 무수히 반복되어 그리면서 그 속에서 그리지 않은, 의도하지 않은 형상(形相)들이 나오면서, ‘검은 바다’가 ‘무(無)’로 만든 세상을 먹으로 그려진 검은 ‘원ㅇ’이 다시 ‘유(有)’로 만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ㅇ’을 그리다 보면, 세상을 다시 바라볼 용기가 생겨, 다시 무의식의 형상(形相)이 아닌 의도된 형상(形相)을 그리지 않을까 싶어서 그 ‘그리고 싶은 마음’을 얻기 위해서 자기 수행과 자기 성찰이 필요했던 것 같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약 9년간 ‘원ㅇ’을 그렸다.
2019년부터 ‘획에서 획(4개의 선, 사각형)’을 그어 그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각형의 형태는 획을 긋는 순간 조금씩 직선에서 벗어나면서 굴곡진 선들이 그어졌고, 결과적으로 사각형이 남나 예측할 수 없는 형태를 만들어 냈다. 갑옷 같기도 하고 움직이는 물체 같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형태를 다듬는 듯이 그림을 완성하였다.
‘원ㅇ’의 반복에서 ‘사각형ㅁ’의 반복으로 바뀐 것이다.
여전히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순간부터 신체의 리듬에 맡기 듯 그리고 있다.
다시 시간의 개념으로 돌아가 보면, ‘시각과 시각 사이의 간격 또는 그 단위’라고 하는 것은 나의 그림에서 그림이 시작된 시각과 끝나는 사이 간격, 하나의 ‘원ㅇ’이 그려지고 두 번째 ‘원ㅇ’이 그려지는 무수한 반복의 간격, 하나의 ‘사각형ㅁ’이 4개의 획이 그려지는 간격이 순간순간의 개별 기준이 되는 시간의 간격이기 때문에 그림을 통해서 신체와 마음이 움직이는 선을 기록한 시간적 그림이란 표현이 가능하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작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란
커다란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오랜 시간을 할애해서 작품을 제작하고,
“삶이 지속되는 한
죽음은 멀리 있다.”
는 것을 자기 수행적인 작품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작가에게 작품을 제작하는 노동만큼 값진 시간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최윤미 CHOI YOONMI 崔允美
1. 작가약력
2008 MFA 동경예술대학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1 BFA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한국화학과 졸업
주요 개인전
2018 '집과 집 사이', 스페이스D,
서울
2016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갤러리담, 서울
2014 'Movement', 안상철미술관, 양주
2012 'Movement', 갤러리이즈, 서울
2009 'Moment by Moment', Gallery kingyo, 동경, 일본
2007 '하나의 잎', 동경예술대학, 동경, 일본
주요 그룹전
2019 '한국화 새로운 지평을 열다', 자하미술관, 서울
2017 '탕진수묵', 동덕갤러리, 서울
2017 '수묵 NEW 드로잉…전', 토포갤러리, 서울
2016 'ZERODATE Art Project 2016', 아키타현 오오다테, 일본
2015 'GIRLS BRAVO!!!!!', artist run space haisyakkei, 이바라키현 토리데, 일본
2015 'Hot寒 세상과 여성작가전', 안상철미술관, 양주
2015 '썽유기락전', 광화문복합문화공간 에무, 서울
2015 '봄 아득하다', 갤러리 We,
서울
2011 'artist + architect collaboration', artist run space
haisyakkei, 이바라키현 토리데, 일본
2011 'ZERODATE Art Project 2010', 아키타현 오오다테, 일본
2010 'Nakanojo Biennale 2009 ', 군마현 나카노조, 일본
2007 'INO ARTISTVILLAGE open exhibition', INO
ARTISTVILLAGE, 이바라키현 토리데, 일본
2006 'Sustainable Art Project [koto no kikoe] ', 동경, 일본
2006 'design_network_asia2006<dna2006>', 안양예술공원, 안양
2006 'NHK고교강좌특집[미술] ',
KANDADA, 동경, 일본
2005 'Sustainable Art Project [koto no tsutae] ', 동경, 일본
작품소장
2016 미술은행
2014 안상철미술관
2. 작업노트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2016
조용한 새벽, 공기가 차갑다. 일상의
소음에서 벗어나 모두가 잠든 시간, 조용한 정적만 남은 새벽이 좋다.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의 리듬은
새벽을 향한다.
가끔은 늦은 저녁에 하루를 시작 할 때가 있다. 작업에 집중하다 보면, 공기의 변화에 의해 시간을 감지하기도 한다. 새벽 5시, 작업에 더욱더 몰입하는 시간이다.
'숨', '호흡', '숨결'의 미세한 변화에 집중한다. 마음의 내밀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빈 여백에 '원○'을 반복적으로 그려 넣는다. '원○'의 표정이 변한다. 어떤 형상을 재현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무의식의 나의 '숨', '호흡', '숨결'에 몸을 맡긴다. 호흡이
차분해지면 명상하듯 천천히 '원○'을 그리기도 하고, 호흡이 급해지면 '원○'을
그리는 속도가 빨라지기도 하고, 집중하지 못하고 그리다 쉬기를 반복 할 때도 있다. '호흡' 속, 자연스럽게
작품 안에서 숨쉬는 필선(筆線)과 농담(濃淡)의 미묘한 변화에 움직임들이 생기고, 그 움직임을 따라 형상 또는 이미지가 서서히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농묵(濃墨)의 먹으로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은 동양의 회화 즉 시서화(詩書畵)의 가장 기본이 되는 점을 찍는 것과 선을 그리는 필법(筆法)과 묵법(墨法)과 관계가 있다. 필법(筆法)의 강약에 의해 선의 두께가 달라지고, 농묵(濃墨)으로 그린 그림에서는 농담(濃淡)이 나타나게 된다. 단순히 '원○'을 반복적으로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작은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선의 강약, 태세(太細), 비수(肥瘦), 농담(濃淡), 완급(緩急)의 변화 등이 그림에 리듬감을 만들고 움직임을 만들어 추상적인 형상을 만들어 낸다.
조용한 새벽 '숨', '호흡', '숨결'의 미세한 변화와 마음의 내밀한 움직임이 그려낸 '원○'은 자기성찰적이며 자기수행적 행위이기도 하다. 불교에 '자리이타(自利利他)', 즉 자신을 수행하여 스스로 이롭게 하여 그 공덕으로 남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와 같이,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은 개인의 번뇌와 욕심,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하고, 바른 삶에 대한 의지 등이 내포되어
있다.
3. 평론
호흡하는
평면 (최승현) 2012
한 걸음 물러서면 도톰하고 결 고운 융단 같은 포근함이, 한 걸음 다가서면 곱게 물들인 손모시 홑이불 같은 서늘함이 느껴진다.
거친 표면 위에 서정적이고 입체적인 연결 구조를 그려내는 작고
둥근 입자들은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듯 생명력을 부여 받은 세포들 마냥 고요한 온기를 발산하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우리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을 법한 작지만 용기 있는 움직임이다. 만약
손끝이 닿는다면 잉크를 머금은 보드라운 숨소리가 이내 전해질 듯하다. 단색의 표면으로부터 이 같은 에너지의
호흡이 전해지고, 입체적인 착시 효과가 발생되는 것은 다소 견고한 네임펜이 움직이며 만들어 낸 마찰력이
두터운 한지의 표면을 자극하여 더욱 거친 질감과 부피감을 일궈내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급 한지나 장지
보다는, 오히려 평범하고 일상적인 종이에 특별함을 선사하고자 하는 작가 최윤미의 새로운 작업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본 전시는 이들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 장이다. 작가는 생명, 인간, 자연에
대한 본인의 관심과 애정, 사물에 대한 존경심 등을 수도자의 묵언 수행과도 같은 방법으로 담백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작가가 본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작업은 자명한 평면의 형식을
기저로 한다. 그러나 그 평면의 공간에는 정지되지 않은 공기의 흐름과 입체적 부피감이 존재한다. 스케치나 에스키스 없는 바탕 위에 번식해가듯 이어져나가는 작은 동그라미 단위들은 개체별로 고유한 시간성을 지니며, 이 시간의 알갱이들은 매 순간의 공기와 습도, 그리고 작가의 내적
에너지를 품어 담는다. 따라서 평면은 서로 다른 시간성과 고유성을 지닌 입자들로 채워지면서 연속된 기억을
형성하게 되고, 하나의 독립된 평면은 한 편의 독자적 기억과 시간을 담는 기록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관람자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불규칙한 농담과 동감을 통해 이를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작가가 작품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명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배려는 색채의 사용에서도 엿볼 수
있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의 평화로운 조화를 통해 작가는 무엇보다 색채와 색채 사이에 에너지의 조형적
균형을 형성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음과 양의 이상적 결합과 조화를 지향하는 동양적 사고를 바탕으로 작가는
물질과 물질, 인간과 물질의 이상적 관계와 공존을 시각화 하고 있으며,
이는 존재와 공존의 근원적인 진리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작가는 일본 나카노조 비엔날레에서 선보였던 장소특정적 설치작업
“하나의 잎”을 통해, 한 때의 반짝이던 생명력을 잃고 사라져간 지역 건축물들의 흔적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지역에 다시 예전의 활력이 되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바 있다.
또한 스스로 소외된 공간에서 바깥세상을 관찰자적 시점으로 바라보거나
불특정의 하루를 기록하는 영상 작업 등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자기반성의 기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은
작가의 관심이 비단 눈에 보이는 현상학적 결과에만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 자아의
내적 성장을 향한 의지와 따뜻한 인류애, 존재와 생명에 대한 경외심 등을 지닌 최윤미 작가의 이번 작업들
역시 하나의 완성된 작업 시리즈라기보다, 더 나은 작가로서 성장해 가고자 고군분투하는 발전적 기록임을
알기에, 다음 작업을 기대하는 필자의 마음이 호흡하는 평면처럼 끝없이 일렁인다.
5인의 작가들의 ‘지그’와 ‘재그’ - 회자정리와 거자필반의 경계에 서서 (윤주한) 에서 발췌 2016
작가 최윤미의
종이는 이제 평면을 벗어나 입체가 된다. 다만 최윤미는 종이의 평면성을 유지한 채로 입체를 구성한다.
말인즉슨, 그는 평면을 위해 만들어진 종이가 입체의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겹쳐 붙여낸다.
최윤미는 한지를 찢어내는 기법을 통해 한지 특유의 제법을 작업에 반영한다. 한지를 구성하는
나무의 거친 섬유질은 그것이 입체로 붙여지면서 마치 보송한 솜털과도 같은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
이 보송한
질감은 배접된 한지가 결국 ‘집’의 형태를 만들어 내면서 의미를 획득한다. 한 때 한지는 집의 내장재로
쓰이기도 했다. 최윤미에게 있어서 한지는 집 그 자체가 된다. 찢겨진
한지의 보송한 테두리는 이제 집을 마치 모피처럼 따스하게 감싸 안는다.
최윤미의
‘집’ 연작이 처음으로 전시되었던 장소는 일본의 한 폐허였다. 사람이 살던 집이 철거된 자리에 최윤미는
작고 투명한 집을 지었다. 투명하고 텅 빈 집은 이제 불투명하고 꽉 찬 집이 되었다. 듬성듬성 놓인 한지 집들은 여전히 작고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이제
최윤미의 집은 보다 만지고 싶고,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되었다.
최윤미: 집과 집 사이 (양은희 2018)
인테리어 잡지가 넘쳐나고 화려한 물건으로 치장하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시대에 집은 마치 옷이나 차처럼 거주자의 성격과 취향, 심지어 계급까지 보여준다. 그러나 들어온 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큰 펜트하우스에도, 단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원룸에도 공통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있어도 편안한 나만의 보금자리라는
주인의 생각이 없다면 집은 그저 한낱 공간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리스인들은 집에 대한 기억이 있는 한 집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집과 인간의 관계는 공존한 시간을 통해 주체와 객체라는 물리적 실재를 넘어선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한 개인에게 집은 단순히 아름답게 치장한 물리적 구조가 아니라 자신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이자 자아라는 주체를
형성한 공간이며 그 공간에서 주관적 경험을 얻고 그 경험을 인식의 중요한 동기로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기억으로서 이미지화한다.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일찍이 <공간의 시학(The
Poetics of Space)>(1958)에서 집안의 가구, 방과 같은 공간을 들여다보며
물건을 담거나 열면서 얻은 심리적 경험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수용되는 시적 이미지를 추적한 바 있다. 너무나
유명해진 이 글은 일종의 공간에 대한 심리학적, 현상학적 분석으로 공간에 대한 의식의 구축과정과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주목했다. 한 개인이 주관적으로 만든 이미지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통주관성(transsubjectivity)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인간의 의식이 작용하는 지 들여다보게 되는데 그
시발점을 집과 집안의 구성물에 초점을 두고 접근한 것이다.
그에게 집은 파편적 이미지뿐만 아니라 그 공간 전부를 아우르는
독특한 경험을 통해 이미지 체계를 형성하고 결국 개인의 기억, 인식의 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집은 인간의 지각과 분리할 수 없는 중요한 현상학적 사물이 된다. 집이라는
공간의 현상학을 통해 개개인이 시간을 걸러내고 현재의 경험에 초점을 두면서도 개방성을 허용하는 상상력이 통주관성에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최윤미의 최근 작업은 집에 대한 사유를 다룬다. ‘집이란 무엇일까?’ 가족의 기억에만 존재하는 과거의 집, 이사를 통해 경험하는 집의 가변성, 그리고 유학시절 거주하던 일본에서
후쿠시마 원전누출 사건으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집까지 여러 곳을 이주하며 겪은 공간에 대한 경험들은 그의 의식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 대한 파편적 기억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거쳐 간 집까지 일상을 보낸 집이라는 존재는 어느
사이엔가 그와 불가분의 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관계에 대한 깨달음은 최근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작업실과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다시 통렬하게 다가온 것 같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과거의 집들을 연상시키고
그 연상과정을 통해 집에 대한 기억은 단순히 기억을 회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바슐라르가 집이라는 공간을 현상학적으로 읽어내며 상상력을 강조했다면, 최윤미는 집에 대한 상상력을 가동하면서
창작 의욕을 발산한 것이다.
최윤미는 사실 후쿠시마 사건으로 인해 한동안 형상을 멀리했었다. 예기치 못한 재해로 인해 사람을 읽고 집을 읽고 떠나고 방랑하게 되었던 사건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한지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공간을 점유해가는 여백의 유희로 반경을 축소했었다.
그러나 추상적인 패턴이 반복되면서 강박적인 반복의 굴레가 작가
스스로에게도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번 전시는 그 반복적 추상패턴을 넘어 과거처럼 설치
작업으로 돌아간다. 공간의 다양성을 읽고 창작의 모티프로 삼았던 과거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창작을 펼칠
시발점을 집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서 주운 돌과, 종이로
겹겹이 구축한 집을 통해 기억 속의 집을 더듬어 본다. 당연히 그 집들은 그가 ‘집’이라는 개념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유인 친근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타자와의 소통과 상상력을 가동시키는 매개체이다. (양은희/전시기획)